[좋은 글] 라 로슈푸코(François VI, Duc de La Rochefoucauld) ... 프랑수아 6세 드 라 로슈푸코, 프랑스 작가, 모랄리스트
- 일반적으로 미덕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은 대개 운명이거나, 아니면 우리들 인간의 술책이 그렇게 하게끔 일구어 주는 여러 가지 행위와, 또 인간관계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남자가 용감하고 여자가 순결한 것은 반드시 용기니 순결이니 하는 것이 그렇게끔 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 대체로 보아 아첨꾼이라고 하지만 자부심만큼 위대한 아첨꾼은 없다.
- 자부심의 나라에서 어떠한 발견이 이루어지든 간에 거기에는 더욱 더 많은 미지이 토지가 남겨져 있다.
- 자부심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모사(謀士)보다도 뛰어난 모사이다.
- 정열을 오래 지속시키고자 하여도 생명을 오래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 종종 정열은 더할 나위 없이 영리한 자를 우둔한 자로 만들고, 더할 나위 없이 우둔한 자를 영리한 자로 만든다.
- 세상에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할만큼 위대하고도 화려한 행위가 얼마든지 있어서 정치가는 그런 것들을 위대한 계획이 낳는 것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흔히 기질과 정열이 꾸며내는 장난이다. 아우크스투스와 안토니우스와의 싸움만 하여도 그들이 세계의 패자가 되고자 하여 품은 야심이 그렇게 시킨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으나, 어떻게 보면 그것은 질투심이 만들어낸 장난이었을는지도 모른다.
- 정열이야말로 24시간 동안 설득을 일삼는 둘도 없는 변사다. 자연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 법칙은 하등 그릇되는 점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단순한 사람이라도, 가령 정열을 품고 있는 사람이 남을 설득하게끔 된다면, 가장 웅변적인 사람으로서 정열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미칠 바 아니다.
- 정열에는 부정이 있다. 또 사욕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으 쫓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가장 이치에 맞는 듯이 보일 때 조차도 그것에 마음을 허락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인간의 내심에는 정열의 끊임없는 발생이 있다. 그런고로 하나의 정열이 사라지 때에는 흔히 다른 하나의 정열이 머리를 들기 쉽다.
- 정열은 흔히 그것과는 반대되는 정열을 낳는다. 식욕은 때로는 낭비를 낭비는 때로는 탐욕을 낳는 일이 있다. 사람은 흔히 약하기 때문에 꿋꿋하고, 겁장이이기 때문에 대담하다.
- 경건을 가장하고 성실을 가장하여 아무리 정열을 싸서 감추고자 하여도 정열은 항상 그들의 면사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 우리들의 자부심은 우리들의 이론이 비방을 당할 경우보다도 우리의 취미가 비방을 당할 때에 한층 더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 인간은 자칫하면 은혜를 잊고 모욕을 잊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까지도 미워하고, 모욕을 가한 사람은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착한 일에 보답하고자, 악한 일에 복수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하나의 굴종인 것처럼 여겨지므로, 인간은 여간해서 그런 굴종을 감수하고자 하지는 않는 것이다.
- 제왕의 인자는 민중에게서 사랑을 받기 위한 정책에 지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 세상 사람이 미덕이라고 찬미하는 예의 인자는, 때로는 허영으로 말미암아, 또 때로는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흔히 공포로 말미암아, 또 거의 언제나 허영과 게으름과 공포와의 집합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일이 있는 것이다.
- 행복한 사람의 절제는 행운을 만나 조용하게 가라앉은 기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자기의 행복에 도취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남에게서 질투를 받기도 하고 또 경멸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런 경우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야말로 바로 절제이다. 우리들의 정신력을 쓸데없이 흐리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보다도 위대하게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다.
- 우리들은 모두가 남의 불행을 참고 보고 있을 정도로 신경이 무디다.
- 현자의 침착이라는 것은 마음의 동요를 마음 속에 가두어 두는 기술에 불과하다.
- 고문을 당하는 자는 때로 침착을 가장하고 죽음을 멸시하는 것같이 행동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것은 죽음을 눈 앞에 직시하는 공포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예의 침착과 멸시가 그들의 정신에 미치는 바는, 눈가리개로 그들의 눈을 씌우는 것과 같다고 말해도 좋다.
- 철학은 과거의 화와 장래의 화는 쉽사리 이긴다. 그러나 현재의 화는 철학을 이긴다.
- 죽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은 흔히 각오를 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망연하게, 그것도 관습에 의하여서 죽는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죽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죽는 것이다.
- 위대한 사람들이 오랜 동안의 불운으로 인해서 맥없이 쓰러져 버리는 것을 보면, 그들은 다만 그 야심의 힘에 의하여서만 불운을 버티어 온 것이지, 혼백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위인영걸이라는 자들도 크나큰 허영심을 제하고 나면 보통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 행운을 지탱하기 위하여는 불행에 처한 경우보다도 더욱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 태양과 죽음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 사람은 은혜도 모욕도 쉽게 잊곤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은혜를 베푼 사람을 미워하는가 하면 모욕을 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은혜에 보답하고 모욕당한 수모를 되갚겠다고 벼르는 일이 그들에겐 더 없는 고역인 것이다.
- 우리가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연이거나 우리의 계략에서 빚어진 온갖 행동과 이해 관계가 그럴싸하게 합쳐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남자의 용감함과 여자의 정숙함이 반드시 용기나 순결이라는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 위대한 사람들이 오랜 불운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무릎을 꿇을 때, 그 동안 견뎌온 것은 야망의 힘이었지 영혼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그들이 남달리 허영심이 강하다는 것말고는 여느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 질투는 나름대로 정당하고 합리적인 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행복을 지키고자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기심은 타인의 행복을 용납하지 못하는 데서 치솟는 분노다.
프랑수아 6세 드 라 로슈푸코 공작 (François VI, Duc de La Rochefoucauld, 1613. 9. 15 ~ 1680. 3. 17)
프랑스의 귀족 출신 작가이자 모랄리스트이다. 대귀족의 장남으로 파리에서 출생한 그는 16세에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하였다. 루이 13세의 궁정에 들어갔으나 프롱드의 난에 가담하여 1652년 앙투안의 결전에서 실명에 가까운 중상을 입었다. 그 후 정치적 야심을 포기하고 고향 베르트유로 돌아가 <회상록>을 집필하였다. 1665년 <잠언집>을 발표하여 그 당시 귀족 사회의 타락을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라슈푸코는 잠언이라는 형식을 빌어 600여개의 문장 속에 보편적인 인간상을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19세기에 발생한 모럴리즘(moralism) 또는 도덕주의 철학은 특정한 도덕을 우선시하는 하는 데 흔히 정의, 자유, 평등을 일컫기도 한다. 모럴리즘을 따르는 모럴리스트는 16세기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수필식으로 현실의 인간 심리나 풍속을 관찰, 묘사하고, 이로써 인간이 보다 잘 살기 위한 방법을 가르친 프랑스의 일련의 사상가들로 몽테뉴, 파스칼, 라 브뤼예르, 라 로슈푸코, 보브나르그 등이 대표적인 모랄리스트들이다. 라 로슈푸코는 '사람들은 자신이 칭찬 받고 싶어서 남들에게 찬사를 던진다.', '우리들이 흔히 미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악덕의 가장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살던 시대의 타락상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데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상을 그리려 하였다는 데 그 뛰어남이 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