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인연 ... 시작 그리고 끝

천년샘 2021. 11. 23. 00:07

누군가에게 주워 들었던 옛날 얘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느 시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얘기는 이렇게 시작 됩니다.

그리 작지만은 않은 구석진 시골에 어리지만은 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아내는 여느 시골 아낙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는 남편과 함께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힘겹게 꾸려 가고 있었답니다. 사람 좋은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늦은 저녁까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성실하게 농사일을 하였답니다. 비록 배불리 먹고 살지는 못했지만 그냥저냥  적당하게 웃음도 보이고 적당하게 눈물도 보이고 적당하게 한숨과 걱정도 해 가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성정이 그리 사납지도 않은 남편이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쳤다치면 아내를 마구 때리는 것 이었습니다.
술 한잔의 매질만 없다면 그리 큰 불만 없이 살 것만 같은 데 아내는 어찌 할 도리가 없어 한숨만 늘어 갈 뿐이었습니다. 이틀 전에도 한차례의 치도곤을 치룬 아내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집안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자신의 마음 고생을 위로하는 듯한 목탁 소리가 대문 앞에서 들려 왔습니다.
아내는 허겁지겁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달려가 바닥이 보이는 쌀독에서 그야말로 바가지가 닳도록 박박 긁어 얼마 않되는 잡곡을 정성스레 모았습니다. 목탁 소리는 두서너 달에 한번쯤 시주를 오시는 스님의 인기척이 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어느 절에 계시는 스님인줄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시주를 오시는 게 아내는 너무 고마웠습니다.
마치 친정 오라비가 시집간 동생 안부가 궁금하여 기별없이 휙 왔다가 "응, 별탈없이 무고하게 지내는구나."하며 인사하는 듯 하여 아내는 기다려지기도하고 오시면 반갑기도 하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틀 전 남편의 매질이 채 가시기 전이어서 그런지 오늘 스님의 나즈막한 불경 소리와 목탁의 경쾌한 소리가 한없이 서럽고 반가웠습니다.
한 줌이 조금 넘을락말락한 시주를 받는 스님의 눈빛은 뭔가 알수 없는 고요함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나무아비타불, 극락왕생만 되뇌이시고 가시던 스님이 오늘은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시더니 입을 떼십니다. "보살님, 이 땡초가 오늘은 보살님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님 왈, 해가지기 전에 논으로 가서 힘껏 들어 올릴 수 있는만큼 한아름 가득 볏단을 묶어 안방 한 구석에 세워두라는 부탁이었다. 아내는 영문도 모르는 채 냉큼 논으로 달려가 너부러져 있는 볏단을 모아 스님이 하라는데로 한아름 가득 묶어 안방 구석에 세워 두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는 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 아내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어두운 길에 남편이 산짐승이라도 만날까 걱정이었고, 술 한잔이라도 걸치고 온다면 매 맞을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걱정에 혼이 다 나갈라칠 때 술 한잔 얼큰하게 걸친 남편이 거칠게 방문을 열고 들이 닥쳤다. 남편은 방을 쓱 훑어 보더니 구석에 세워둔 볏단을 두손 가득 벌려 안아 들고 사정없이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볏단으로 내려치던 남편은 어느 정도 성이 풀렸는지 이내 넉사자로 뻗어 코를 골아대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볏단으로 사정없이 매를 맞기는 하였어도 멍든 곳 하나 없이 다음 날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아내는 스님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날 이후로 남편이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내는 이제 밤 늦게 남편이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돌아오면 행여 오시는 길에 돌부리에 걸려 다친 곳은 없는지 산짐승은 만나지 않았는지 살피기에 여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변해 버린 남편에 홀려 서너달이 어찌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던 날에 반가운 목탁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반가움에 허겁지겁 달려 나가니 스님이 어린애마냥 환한 웃음으로
"보살님, 안녕하셨습니까?"
하며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아내는 다짜고짜 스님께 볏단에 얽힌 일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인자한 목소리의 스님이 아내에게 자초지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생에 남편과 아내는 소와 주인이었답니다.  주인인 아내는 평생을 걸쳐 소인 남편을 매질하던 업보가 쌓여 이생에 부부의 연으로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러하니 그 업보를 갚기 위해 전생에 때린 매를 다 맞아야 했었답니다. 이를 측은히 여긴 스님이 앞으로 맞아야 할 매질을 볏단으로 묶어 한꺼번에 업보를 해결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답니다. 맘씨 고운 아내와 성실한 남편은 이생의 남은 연을 행복하게 잘 꾸리며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이생에서의 부모 자식의 연은 전생에서 대부분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많다고 합니다. 잘난 자식은 이생에서 부모에게 진 빚을 갚아야 되기에 잘나게 태어난답니다. 못난 자식은 전생의 빚을 받으려고 왔답니다. 부모가 또는 자식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맘과 다르다면 아마도 그래서 그럴겁니다.

이생에서 성실히 채무자와 채권자의 책임을 다 한다면 다음 생에는 새로운 좋은 관계로 만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부모 자식이 이생에서 새롭게 만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렇다고 느끼신다면 부디 좋은 인연을 만들어 다음 생에는 금실 좋은 부부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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