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3대가 좋다는 데.. 조상님을 모실 명당을 찾아보자.
하시는 일이 잘 안 되시나요? 혹시 점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사주팔자나 타로 카드 점을 본 적은 있으신가요?
여기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네요. 현재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어 많은 휴양객들이 찾고 있는 성수산이라는 '명산'이 있습니다. 산도 산이지만 이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상이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요, 천년이 훌쩍 넘은 이 고찰에는 왕을 만든 명당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풍수도참가로 유명한 도선국사는 성수산을 보고 ‘천자를 맞이할 길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 탄복하고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을 찾아가 왕건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권했다고 한다. 도선의 뜻에 따라 계곡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왕건은 하늘로 부터 고려 건국의
계시를 받았고, 이 기쁨을 억누리지 못해 바위에 글을 새겨 ‘환희담(歡喜潭)’이라 불렀다네요. 이는 상이암 사적 기록에 남겨졌고 이같은 설화는 당나라 문헌인 당일선사기에도 적혀 있다고 전해졌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 무학대사의 안내를 받아 상이암에서 치성을 드렸는데, 하늘에서부터 “앞으로 왕이 되리라”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또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를 드릴 당시 용이 나타나 자신의 몸을 세 번 씻겨주는 꿈을 꾸고 기뻐하며 ‘물과 산, 대지의 기운이 맑은 곳’이라는 뜻의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씨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왕의 기운이 흐른다는 '상이암'은 아는 이만 아는 명당으로 좋은 기운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암암리에 찾아와 치성을 드리던 곳이었다. 그런던 중 2014년 '정도전'이라는 사극 드라마에 소개 되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성수산 아홉개 능선이 태극 모양으로 휘감아 모여드는 구룡쟁주지지(九龍爭珠之地) 상이암.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 아홉 능선이 만나 기(氣)가 충만한 중심에 자리한 '상이암'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도선국사가 성수산을 둘러보고 천자봉조지형(天子奉朝地形)이라 탄복하며 ‘도선암’이라는 암자를 창건했다. 875년(헌강왕 1년) 때 국사 도선(道詵)이 창건한 이곳은 1394년(태조 3년) 선사 각여(覺如)가 중수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하늘에서 “앞으로 왕이 되리라”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해 절 이름을 ‘상이암’으로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1894년 동학혁명으로 불타버린 것을 1909년 선대 대원(大圓)이 중건했다. 이후 의병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상이암을 근거지로 삼고 항일운동을 전개해, 왜병들에 의해 소실됐다 중건됐지만, 6·25로 인해 완전히 소각됐다. 지금의 건물은 1958년 신도와 행정의 도움으로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이암은 작은 암자지만 성수산 꼭대기서 내려다 보면 9개의 능선과 계곡이 나선처럼 이어지다가 모이는 지점에 자리해 있다. 이는 풍수학적으로 보면 태극 모양인데 ‘용이 문 여의주 지점’이라고도 한다.
상이암 대웅전 앞에 자리한 수령 120년이 넘은 화백나무가 있는 데, 특이한 점은 50m 높이로 우뚝 선 이 나무는 밑동은 하나지만 위로 아홉 개의 가지가 마치 한몸처럼 뻗어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용 같이 긴 아홉개 능선이 앞다투어 모이는 구룡쟁주형세와 비슷해 화백나무 아래 자리한 쉼터는 기를 받기 위한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의 에피소드가 숨겨져 있는 이 암자의 위치는 가히 문외한이 보기에도 뭔가 신령스러운 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묘한 기분이 들게하는 곳이다. 과연 명당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조상의 보살핌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상을 잊고 살아가다 문득 일이 잘 안 풀릴 때 조상 탓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 한번 쯤은 조상의 묘를 살펴 보자.
이미 묘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 묘자리가 명당인지 아닌 지는 일반인 눈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유명한 지관이 잡아 준 비싼 자리이면 명당이려니 하고, 적당한 금액에 앞이 훤한 자리이면 그럭저럭 불만 없이 묘를 썼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도저도 아니면 낮으막한 언덕 땅 조금 사서 그 곳에 모셨을 수도 있고, 조상 대대로 농사 지어오던 논, 밭 한 한켠에 모셨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사유로 인생만큼이나 많은 이유로 조상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현재에는 매장 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이고 그러다보니 명당 묘자리에 대한 인식도 많이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마도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흐르면 새로 묘를 쓰는 것 보다는 있던 묘를 납골장이나 가족묘 등의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추모공원이나 사립 추모공원으로 옮겨 와서 후손의 불편함을 덜어 주려는 추세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현 상황에 비추어 보건대 새로운 명당을 찾는 것보다는 조상님의 묘를 한번 더 살펴 보는 게 의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좋은 명당인지 아닌 지 따져 보기 전에 일단 선조들의 묘를 살펴 보자. 우선 분묘의 주변을 살펴보자. 주변에 묘를 중심으로 최소 5m 이내에 크거나 작은 나무는 없는 지 확인하자. 나무 뿌리가 땅 속에서 뻗어 묘를 침범하여 시신을 훼손하고 있다면 후손에게 건강 상의 문제가 있을 수가 있다. 시신의 머리 쪽이면 그 후손들은 정신적인 병이 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 몸 쪽이라면 심장, 간 등의 질병에 고통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묘를 가신다면 묘의 주변을 잘 살피시고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으면 뿌리째 뽑아 정리를 잘 해 주셔야 된다. 이미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면 가족들 간에 회의를 해 보실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둘째로는 분묘의 잔디 상태를 살피셔야 한다. 잔디가 꺼진 부분이 있다거나 쑥 등의 잡초가 많아 보인다면 땅 속 수맥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땅 속에 물줄기가 형성되어 시신이 물에 젖는 다면 후손에게는 심하면 알콜 중독, 혹은 약물로 인한 질병의 우려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맞으면 안되겠지만 풍수는 일종의 미신이라기 보다는 통계에 가깝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은 마을마다 그 동네에서 묘자리 잘 보는 집안들이 있었다. 대를 이어 묘를 잡아 주던 동네 어르신이 계셔서 이 분이 살아 계실 때는 거의 동네 대부분의 묘를 잡아주고 우물 자리를 찾아주고 그래 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한 곳에서 수 십년, 수 백년을 살아오면서 누구네 집에서 어떤 일들이 있어 왔는지를 기억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기록에 남겨 그것을 공부해 온 집안이라면 어떤가?
그것을 현대어로 빅데이터라고 부른다면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을까? 그 후손 중에 영특한 이가 있어 이런 조그만 동네에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산과 강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공부했다면 과연 간단하게 무시 할 이야기일까?
풍수는 아직까지는 과학이라기 보다는 주술 같은 거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래 시간을 이어저 내려 온 데는 그만한 사유가 있을 터, 하는 일이 잘 안 될 때, 흙수저로 태어난 것에 슬퍼하지 마시고 힘을 내서 조상님 묘 한번 찾아가서 살펴 보시고, 조상님께 도와주십사 하고 기도 한번 하고 힘을 얻어 보시길 바란다.